미래는 남은 자의 삶이다
미래는 남은 자의 삶이다
영원한 친구도 없고 적도 없는 세상이다
내가 오늘을
적과 친구를 가르는
삶 뿐이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한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밀림의 숲에 두 사람의 만남이 원수일 수는 없다.
언어가 소통이 안된다 할지라도 친구며 의지적 삶일 것이다.
인간을 형상을 바꾸어 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탐욕이란
독약 중에 맹독성 독약이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탐욕은
현실을 살아가는 탐욕의 원조가 된다.
탐욕이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생각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시간적 공간적 영역을 탐욕하는 자들이
미래를 지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자'가 미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떤 자를
'남은 자'라고 할까요
장수하며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
아직도 살 시간이 많은 사람들....
미래를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
내 꿈이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은
남은 자들이 아닐까 ?
이 땅에 없는 자들은 끝인가.
우리가 의식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죽음을 위한 것이라는 대 명제가 된다.
많은 치매환자들이 늘어 나고 있다.
자식도, 아내와 남편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는다.
존재적 가치(Being)
실천적 가치(Doing)
삶의 목표를 정하는 이정표가 된다.
거짓 스승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알려야 할 대중 정보매체들은 거짓을 말하는데
혈안을 내고 있다.
그래서 알 권리를 매개체를 통하여 부정되어 간다.
이제 스스로가 존재적 가치에서 시작해야 한다.
남은 자들은 존재적 가치성을 목표로 지향한다.
실천적 가치는 방향성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존재적 가치의 목표는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남은 자의 삶이란 ?
나에 의하여 내 삶이 완성된다면
나는 영원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완전성과 초월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초월성은 지식과 환경과 삶의 영역의 불가능을 초월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금기된 영역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 금기된 영역을 지식이란 포장에 감추고 있다.
포장된 것을 현실의 인식으로 표현하는
이중적 잣대로 자신을 속이며 살아 간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삶이다.
이건 정말 우매한 일이다.
남은 자는
이것을 알고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초월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로썬 할 수 없는 영역을 가능케 한 삶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진리라고 말한다.
그 진리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이다.
탐욕으로 포장된 진리가
나를 망가트려진 것을
이제는
회복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 '남은 자'의 삶이다.
그것을
거듭남, 인치심이란
단어로 귀결된다.
회복되어지는 것을
다시 말하면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진리안에 있다고 말한다.
형상이 회복된 내가 진리안에 있는 삶을
'남은 자'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미래는 남은 자의 삶이다.
이것은 참 진리로 변개될 수 없는 원칙이다.
절대적 원칙이며 불변적인 진리이다.
어떠한 위력이나 환경이나
변개할 수 없는 영원한 참인 진리다.
우리 모두는 남은 자의 삶으로 궤도를 수정하여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루시며 살아가는 미래의 주인이 됩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이 진리를 아시고
미래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나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2월 21일 '처음사랑 담당자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