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에 대하여 (6)
십일조(6) - 신약
히 7:1-10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십분의 일 – 데카테(십분의 일 tenth, 십일조 tithe)
1. 일반 헬라어 및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데카테는 데카(열, 십)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것의 '십분의 일부분', '열의 하나', '십분의 일'을 의미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데카테는 신약성경에서 4회 히브리서에만 나온다. (히 7:2, 히 7:4, 히 7:8, 히 7:9)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을 통해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레위에 대해 언급한다.
(a) 신약성경에서의 십일조
십일조가 구약성서 및 초대 기독교와 동시대의 유대교에서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여온 이래,
교회에 행한 어떤 교훈들에서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바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언급하시지만(마 23:23 눅 11:42; 눅 18:12)
그는 결코 제자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을 통해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레위에 대해 언급한다
(히 7:2, 히 7:5). 그러나 바울은 가난한 사람을 돌봐주고(고전 16:1-3; 고후 8-9; 엡 4:28)
기독교 사역을 유지할 수 있도록(고전 9) 소유를 나눠주라고 말한다.
그는 관용을 주장하고 명령하지만(고후 9:6; 고후 8:1-5) 결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로 어떤 특정한 양을 바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즉 모(母)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연보하라고 요구하였다(고전 16:1-3; 고후 8:4; 고후 9:1, 고후 9:12).
여기에서 사용된 로게이아라는 말은 자선 예배시에 징수된 자발적인 기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 징수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으므로 바울이 이 생소한 단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들어,
우리는 그 연보가 바울 교회의 교인들이 교회 전체의 본부로서의 예루살렘 교회의 지위를 인정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성도들)에게 공식적으로 바친 세금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팔레스틴의 안과 밖에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매년 성전에 바친 인두세와
동일한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개념상 십일조와 매우 유사한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이 연보(로게이아)라는 말 즉 전문적인 회계 상의 용어로 간주될 수 있는 단어를 오직 두 번만 사용할
뿐이며(고전 16:1 이하) 곧 그 말을 경건한 어법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사실과 바울이 연보를 거둔 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 있던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해 주기 위함이었다(롬 15:26)는 사실은 그런 가설의 반증이 된다.
롬 15:26 -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주는 것'이라는 말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용법을 모두 살펴보고
카리스 : 은혜(고전 16:3), 코이노니아 : 친교 (고후 8:4), 디아코니아 : 봉사(고후 9:1),
율로기아 : 찬양, 축복(고후9:5 )
고후 9:5 -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그 주제에 대한 그의 분명한 가르침을 고찰해 보면(롬 15:25-28; 고전 9:8-18; 고후 8-9) 기독교인들에 있어서 주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유 의지의 행동 즉 세금이나 십일조처럼 그에게 일정한
양이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자의로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주기로 작정한 대로(고후 9:7),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가 성공한대로
(고전 16:2) 연보를 한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하나님의(그리스도의) 종 Slave(둘로스, 롬 6:16, 고전 7:22, 엡 6:6, 벧전 2:16)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연보를 바친다.
사실상 그 자신도 재물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용할 수 없다(고전 6:20).
본래 기독교인은 주인의 재산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은 청지기이며(벧전 4:10), 장차 그는 이 재산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롬 14:12).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자기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 있으며(고후 8:9), 자신 안에서 활약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자신의 자발적 동기로 삼고 있기 때문에 연보를 바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연보는 구약성서 시대의 성도들의 연보와는 달리 마지못해서 하거나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며(고후 9:7) 연간 수입의 십분의 일로 정해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즐겁게 자발적으로 체계적이며 한없는
긍휼로 행해졌다(고전 16:1, 고후 9:6-9).
(b) 초대 교회에서의 십일조
사도 교부들과 변증론자들의 문헌들에는 십일조를 일컫는 일상적인 단어들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보를 바치는 것은 여전히 계속해서 초대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스틴 마터는
매 주일마다 "성공한 사람과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정한 만큼 각각 기부한다.
거둬들인 것은 대표자에게 맡겨두며 그러면 그는 그것을 가지고 고아와 과부와 곤란받는 사람들과‥‥감금되어 있는 사람들과
우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이방인들을 돌봐준다"고 말하고 있다.
이레니우스는 기독교인들은 "자유"를 누렸으며 따라서 외적 강제 없이 연보를 바쳤으므로 십일조를
기독교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유대의 율법으로 간주하였다.
오리겐(Origen)은 기독교인들의 연보제도가 십일조 제도를 훨씬 상회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신약성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의 교부들도 십일조 제도를 과거의 것으로 여겼으며
이제 연보에 대한 새로운 원리가 그들을 지배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성령의 내적 충동에 참여하도록
자신들을 독려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초대 교회사 시대에도 여전히 연보는 자발적인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성공시켰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직접 관련되어 있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행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성직자의 생활비와 교회의 유지비가 어떻게 충당되었느지에 관하여 말해주는 기록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사역하는 대상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가져 온 선물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십일조 제도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받아들여 졌다. 그 제도는 맨 처음에 마 10:10, 눅 10:7, 고전 9:3 이하 등과 같은 신약성서의 성구들에 힘입은 가르침에 의하여 자발성의 토대 위에서 재도입되었다.